‘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는 피천득 작가의 [인연]중 한 구절로 아사코라는 여인은 일제강점기, 작가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사랑했던 여인이다. 이 구절이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아직 가슴속에 묻어둔 인연을 잊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애를 잊을 수 없는걸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시절 나는 휴가를 나와 학교에 갔었다. 먼저 제대한 학과 동기의 소개로 15학번 새내기들과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애를 만났다. 성격이 털털하고 웃음이 예쁜 그 애를 보자마자 호감이 생겼다. 그날이 지나고 휴가 복귀를 하려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였다. 맞은편 정류장에 그 애와 닮은 사람을 보고 가슴이 설렜던 기억이 난다.
두 달이 지나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을 했다. 자연스레 그 애의 생각이 났고 학과 개강총회 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애의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훨씬 예뻐 보였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자리였지만 모든 신경은 그 애를 향해있었고,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내 마음은 오직 그 애에게 향해있었다.
친구들이 술에 취해 얼굴에 상기되어 갈 즈음 그 애가 없어졌단 걸 알았다. 그 자리를 나와 바로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시간이 늦어서 집에 갔어요.’라는 대답을 들었고 제대로 얘기한번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무작정 그 애의 집을 찾아갔다.
그날 밤, 그 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동자에 밝게 빛나는 입술, 청초한 피부에 단아한 말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내 손 위에 그 애의 손을 포개고 그 애의 숨결이 내 입술을 닿을 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그 애의 목을 안고 얼굴을 맞댔으며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고 그 애의 고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그 애의 곁에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 애는 수수하고 싱그러운 하나의 꽃이였고 나는 꽃내음에 취해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마치 그 애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 주위를 그렇게 날아다녔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시간은 왜 이리 짧은 걸까.
너무도 좋아했기에 헤어짐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배신감이 컸다. 전화를 걸어 무작정 화를 냈다. 나는 대체 너에게 무엇이었냐고 혼자 그렇기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거냐고 원망했다. 그 애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전화기만 부둥켜안고 밤을 새웠다. 더 이상 그 애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행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겁고 괴로운 꿈에 시달리다가 늦은 오후에야 눈을 떴다. 그 애를 향해서 끊임없이 팔을 내밀고, 그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가 했는데, 허망한 꿈이였다. 내 몸은 공허한 침대에 누워있었고 꿈속에서 그 애를 그렇게 찾아다녔나 보다. 미처 잠도 다 깨지 않았는데도 가슴은 왜 이렇게 아픈지 끊임없이 눈물이 났다. 아무리 울어도 괴로운 가슴을 달랠 수 없었다.
마음속 빈자리를 채우려 술을 마셨다. 아픔이 작아질까 의미 없는 만남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애와 닮은 여자를 보면 그 애 생각이 난다. 저녁 쓸쓸한 바람에 그 애를 떠올려 본다.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 일도 없는데 뜬금없이 그 애가 보고 싶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결심한다. 이제 더 이상 그 애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매일 유혹에 지고 나서는, 내일은 정말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 내일이 돌아오면 또다시 그 애의 사진을 꺼내보며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기말고사가 끝났다. 나는 기숙사를 떠나 집으로 갈 생각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할지라도 그 애가 다른 사람 곁에 있는 걸 차마 보고, 듣고 싶지 않으니까.
인연이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말한다. 갓 전역하여 어리숙하고 미숙했던 나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년도 채 안되어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던 그 애와의 인연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 그 애를 만난 건 그저 흔한 인연중 하나이겠지. 내 기억 속에 묻어둔 그 애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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