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
오래된 손목시계에는 수많은 흠이 나 있다. 이지러지거나 매어진 틈새로 그간의 세월을 느낀다. 회전하는 침과 톱니바퀴는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다. 그저 정적 속에서 고요하게. 매번 시간 약속을 어겼던 나에게 네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다. 참 오랜 시간 동안 내 손목에 둘려졌었다.
그저 마지못해 차고 있었다고 부정하겠다. 시계는 마치 수갑처럼 내 삶을 부여잡고 있었다.
이제 수갑을 끄르다. 오랫동안 갇혀있던 손목은 빛을 받지 못해서 아주 뽀얗다. 너와의 시간은 전부 다 이 시계에 담은 채 버리겠다. 하지만 손목 흔적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아 짜증이다.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너와 나의 마음이 같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 고문에 질렸다.
너와의 시간은 마치 사랑처럼, 마치 사탕처럼 달콤해서 끊임없이 베어 물고 있었더니 어느새 혓바닥과 입천장에서 피가 난다. 입안 가득했던 달콤함은 금세 돌변해 비릿함만이 남아있다. 너와 함께라서 행복했던 시간으로 더는 내게 준 상처를 덮을 수가 없다. 추억에 만료 기한이 있나 보다.
이해하려 했으나 똑같은 고민이 반복되고,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나는 그만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너의 생각에 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만 손을 놓겠다. 사랑하는 너를 잃었지만 찾지 않을 것이리라. 네가 다시 찾아와 놓아버린 나의 손을 부여잡을지라도,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더는 구속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너와 이별하겠다.
우리의 이별이 단연 너만의 잘못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너와 나를 더하면 둘이기는 하나, 우리 둘은 짝을 이룬 또 다른 하나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별이 어찌 너만의 잘못일까. 우리는 방금까지 하나였는데 말이다.
참 이상하다. 하나일 땐 그렇게 둘이 되려고 안달이 났었는데, 막상 둘이 되고 난 다음에는 하나의 짝이 될 수 없음에 이별을 선택하는 꼴이라니. 결국 남은 거라곤 허전한 손목과 그 자리에 뽀얗게 새겨진 지난날의 추억들뿐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꿈꿨기에 적막 속 아련함이 감돈다.
새하얀 도화지에 조심스럽게 수놓은 한 폭의 수채화.
빈 곳을 하나둘 채우고, 색에 색을 더하며 정성스럽게 칠하는 찰나, 그만 물 조절에 실패해서 자국이 생겨버렸다. 보기 싫은 물 자국이 얼마나 눈엣가시인지 모른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완벽했을 텐데, 도화지가 말라 우는 순간 덧칠하기를 반복하나 그만 도화지가 찢어져 버렸다.